ARM, 애플만이 할 수 있는 도전

애플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이미 들으셨겠지만, 애플이 이번 WWDC에서 맥의 ARM 아키텍처 이주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WWDC에서 이주를 발표하고 개발자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 후 2021년 ARM을 탑재한 맥을 내놓는다는 설이 유력한데 덕분에 전역 후 16인치 맥북프로를 사려고 했던 제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까요?

2006년부터 애플은 맥에 인텔 CPU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었죠. 특히 2008년에 출시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텔 코어 i 시리즈는 경쟁사였던 AMD를 압도하는 성능을 보여주며 최고의 PC용 프로세서 제조사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대충 스카이레이크까지는 말이죠.

 

배경 : 14nm 깍는 노인

현재 인텔은 2015년에 나온 스카이레이크 이후로 유의미한 성능 개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세대부터 10세대까지 14nm 공정을 우려먹으며, AMD가 라이젠을 내놓으며 인텔을 따라잡으려 하자 코어 개수를 늘려 이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코어 수가 늘어나자 발열과 전력 소모는 더 심해졌죠.

데스크탑이야 대장급 공랭 달아주거나 적당한 일체형 수냉 쿨러 달아주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이지만, 컴퓨터 판매량의 80%가 랩탑이고 20%조차 대부분 일체형 PC, 미니 PC인 애플에겐 매우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텔 CPU에 보안 취약점까지 발견되었네요? 결단을 내릴 때가 왔습니다. 두 가지 옵션이 있죠. 첫 번째는 요즘 뜨고있는 AMD의 라이젠, 두 번째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쓰이고 있는 자체 설계 CPU입니다.

 

라이젠도 테스트 해봤을것이다

WWDC 2005에서 스티브 잡스가 파워PC에서 인텔로 이주할 것을 발표할 때 이렇게 말했었죠.

Mac OS X는 지난 5년 동안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에 관한 루머가 있었죠.

(중략)

우리에게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OS X에 대한 설계는 프로세서에 독립적이어야 하고 모든 프로젝트는 Power PC와 Intel 프로세서를 위해 구축되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지난 5년간 발매된 Mac OS X은 파워PC용과 인텔용 둘 다 컴파일되었었습니다.

– 스티브잡스, WWDC 2005 –

작년에 macOS 10.15.3 베타 버젼에서 AMD의 APU와 Navi21의 코드가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내부에서 AMD 프로세서로도 테스트를 해보았을 겁니다. 이때 발견된 AMD 프로세서는 1, 2세대 라이젠 APU인 레이븐과 피카소. 그리고 당시에는 발표 전이였던 3세대 라이젠 APU인 르누아르, 저전력 프로세서로 추정되는 반고흐가 있습니다.

인텔의 칩이 발열도 심해지고 전기도 많이 먹어 맥북 에어 같은 랩탑에서는 도저히 못 써먹을 정도가 되자 AMD와 ARM 프로세서를 테스트 해보았을것입니다. 쓰레드리퍼나 라이젠 3700 같은 고성능 프로세서 대신 APU와 저전력 프로세서 코드가 나온 이유는 아마도 아이맥 프로나 맥프로까지 한 번에 바꾸기엔 애플도 부담을 느꼈을 거라 생각되네요. 맥북 에어처럼 높은 성능이 필요하지 않은 기기부터 바꿔 가려 한다고 추측해봅니다. 어쩌면 12인치 맥북을 부활 시킬 수도 있고요.

 

왜 ARM인가

그렇다면 왜 AMD 말고 자체 설계 ARM을 선택한다는(루머가 압도적인) 걸까요? 우선 CPU 제조사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인텔이나 AMD 프로세서를 사용할 경우, 과거 맥북프로에 DDR4가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애플에서 원하는 부품을 넣을 수 없거나 출시일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지만 애플 설계 ARM 칩을 이용한다면 이럴 일이 없겠죠?

두 번째 이유는 돈입니다. 자체 설계 프로세서를 사용한다면 맥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금액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세서 설계가 아무나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애플은 이미 아이폰의 A 프로세서, 애플워치의 S 프로세서, 에어팟의 W 프로세서, 맥에서 CPU의 보조 역활을 하던 T 프로세서를 설계하면서 ARM 프로세서 설계 경험을 많이 쌓았습니다.

어차피 아이폰 때문에 매년 새로운 프로세서를 설계해야 하며 여기에 전력 더 넣어주고 코어 몇 개 더 박고 클럭 좀 올리면 맥에서 쓸 수 있는 프로세서가 어렵지 않게 완성될 겁니다. 이렇게 절약한 돈으로 맥의 가격을 인하한다면 더 많은 판매량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고, 애플이 애플 해서 가격이 그대로라도 마진이 높아져 돈을 더 많이 벌 겁니다.

마지막 이유는 ARM의 성능과 전력 소모입니다. 이미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들어가는 애플의 ARM 칩은 Geekbench 점수 기준 13인치 맥북 수준은 나옵니다. 긱벤치가 x86에게 불리하다고 하긴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이게 아이폰, 아이패드에 들어가는 저전력 칩에서 나온 성과인데 전력을 더 주고 코어와 클럭을 늘리면 어떻게 될까요? 맥북 에어는 물론 13인치 맥북프로의 성능까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텔 프로세서보다 발열 적은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거기다 배터리도 더 오래가겠군요.

 

호환성은?

많은 분들이 가장 걱정하시는 게 기존 프로그램과의 호환성, 윈도우와의 호환성일 것입니다. ARM 용 윈도우10의 경우 극소수의 ARM 용으로 나온 프로그램들은 몰라도 대부분의 앱은 에뮬레이터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출시된 대부분의 윈도우 ARM 기기들은 성능이 영 좋은 편이 아니라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죠.

이러한 점에서 macOS가 윈도우보다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몇몇 제조사에서 ARM 기반 기기를 내놓아도 여전히 대부분의 기기들이 x86 기반인 윈도우와는 달리 맥 생태계는 애플이 ARM으로 전환한다고 하면 몇년안에 대부분의 하드웨어가 ARM 기반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제조사들은 ARM 용으로 앱을 다시 만들겠죠. ARM에 맞게 앱을 다시 만드는 과정도 쉬울 것입니다. 로우레벨 크게 건드리지 않는 앱들이라면 웬만해선 빌드만 다시 해주면 끝날 것입니다. 애플이 그렇게 만들걸요?

컴퓨터를 잘 모르는 일반 사용자들도 내 컴퓨터의 프로세서가 x86인지 ARM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니버설 바이너리를 이용해 한 개의 앱에 각각의 아키텍처에 맞는 실행 파일이 둘 다 있을 테니까 말이죠. 용량이 두 배가 되는 거 아니냐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리소스 파일은 공유하니 용량 증가도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iOS에 있는 수백만 개의 앱들을 맥으로 옮겨올 수 있는 프로젝트 카탈리스트도 더 잘 작동하겠군요. iOS 기기와 같은 아키텍처를 사용하니까 말이죠.

부트캠프는 어떨까요? 지금 당장은 윈도우의 ARM 지원이 빈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맥의 점유율이 낮으니 처음엔 크게 신경 안쓸수도 있겠죠. 하지만 맥의 점유율이 분명 낮긴 해도 절대 무시해도 될 정도는 아니며 젊은 층과 미국에서의 점유율은 이보다 더 높습니다. 맥이 ARM으로 전환하면 윈도우의 생태계도 몇 년 안에 분명히 바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에뮬레이터 돌려야 하겠지만 그래도 인텔의 i3 정도 성능은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ARM으로의 전환은 애플만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서피스 프로 X를 보면 알 수 있듯이 MS에서도 원하는 일이며 삼성, 레노버 같은 여러 기업에서도 ARM 기반 기기를 조금씩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환성 문제로 인해 그 어떤 회사도 메인 제품을 ARM으로 전환하는 도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안 돌아가거나 에뮬레이터 방식으로 인해 느리게 돌아갈 테니까요. 윈도우를 만드는 MS도 서피스 프로 X라는 제품을 내놓긴 했지만, 시장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오직 자사의 기기만을 위한 OS를 직접 만드는 애플만이 할 수 있는 도전입니다. 과거 개인용 컴퓨터와 마우스를 이용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보급하고, 스마트폰을 재탄생시켰으며, 무선 이어폰 시장을 활성화한 애플이 ARM을 통해 PC 산업의 새로운 혁실을 가져올 것을 기대해봅니다.